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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샤피로의 역사의 오른편 옳은편 (2) - 서구 문화의 두 원류 p35~42

췍췍/역사의 오른편 옳은편 (벤 샤피로)

by 개발하는 정복자 2022. 6. 4.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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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오른편 옳은편 - YES24

서구의 번영, 전체주의 몰락에서 배운다-‘옳은 편’에 서는 자만이 흥성함을 역사는 증명한다팬데믹(pandemic)으로 번진 2020년 벽두의 우한코로나 사태에서 보듯, 한껏 작아지고 국경도 무의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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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교회학교 시절 아주 잠깐 스치고 지나갔던 바로 그 사람들이 만들어 낸 가치 체계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안타까운 점은 우리가 그 인물들의 중요성을 아주 오래 전 망각해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p35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고 그 인간은 이성을 통해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를 탐험하고 연구하 수 있다는 두 가지 중요한 원칙, 우리는 바로 이 근원적 기반 위에 자유의 개념이 설립되었다는 사실을 믿는다. 그 두가지 기반 중 하나는 예루살렘으로부터, 그리고 또 하는 아테네로부터 각각 파생되었다.

 만약 우리의 삶이 단순히 물질적인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회피하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의미한다고 믿는다면, 당신은 예루살렘과 아테네적 사고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정부가 개인의 권리 행사에 관한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고 판단한다면, 또 개인은 각자에게 부여된 도덕적 의무에 따라 덕을 추구해야한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예루살렘과 아테네의 영향 아래 있는 것이다. 만약 인류가 이성을 통해 세상을 진보시킬 수 있고 인간은 보다 높은 목적에 따라 진보에 참여하게 된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당신은 스스로 원하든 원치 않든 예루살렘과 아테네적 사고의 결과로 나타난 존재물인 것이다.

 예루살렘과 아테네는 과학을 만들어 냈다. 인권은 유대 기독교적 가치와 고대 그리스적 자연법 사상이라는 두 가지 이상에 기반하여 설립되었다. 번영과 평화, 그리고 미적 아름다움 역시 예루살렘과 아테네적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예루살렘과 아테네미국을 건국했고, 노예제를 철페했으며, 나치와 공산주의를 종식시켰고, 수십억의 사람들을 빈곤으로부터 구출해 냈으며,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삶에 목적을 부여해 주었다. 인류가 진보를 경함한 분기점마다 예루살렘과 아테네는 사상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이때 내 생각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와 기독교적 사상의 공존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그에 대한 대표적인 예시가 아래에 있다.

한 청년이 예수께 찾아와 물었다.

“선생님, 제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다.

“생명으로 들어가려거든 계명을 지켜라”

청년이 대답했다. 

“저는 언제나 그 계명들을 다 지키고 있습니다. 아직도 무엇을 더 해야 합니까?” 

예수께서는 다시 청년에게 이르셨다. 

“만일 네가 완전하게 되려거든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말씀을 들은 젊은이는 큰 부자였으므로 침울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예수님은 떠나는 부자청년을 보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다. 다시 말하지만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위 이야기를 잘못 해석하면 자본주의 사상과 기독교적 사상은 공존이 불가능하다는 해석이 도출된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철저히 기독교적 가치 아래 살아가는 사람에게 매우 유리하게 작동한다. 개인의 자아실현의 가치를 인정해 주고, 그에 대한 자유가 보장되고, 열심히 살기만 하면 사회에 선한 존재가 되는 자본주의다. 아담의 원죄라는 설정과 그에 대한 대가로 남성은 평생 수고하며 의식주를 해결해 가야 한다는 설정(노동의 중요성),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을 내어주며, 겉옷을 달라는 자에게 속옷까지 벗어주며, 오리를 가자는 자에게 십 리를 가주고, 구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며,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사상(이웃 사랑), 인간을 단순히 수많은 뉴런의 발현 집합체가 아닌 신의 축복으로써 만들어진 고귀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도덕적인 삶)은 삶을 도덕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고귀한 숙제로 여기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은 고귀한 숙제를 풀어 감으로써 고차원적 도덕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보다 자본주의가 적합한 사상이 어디있겠는가?

 

그 둘 사이 팽팽한 긴장으로부터 파생되는 효과를 거부한 문명은 먼지가 되어 역사에서 사라졌다. (ex. 옛소련, 나치 독일, 베네수엘라)

미국 사람들은 다른 나라는 몰라도 미국에서만큼은 국가를 분열시킬 정도의 분쟁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와 같은 낙관론은 철저하게 잘못되었다.

 우리는 유대 기독교적 가치관과 그리스적 자연법 사상을 버리는 한편 그 자리를 도덕적 주관주의와 감정 규범으로 대체하고 있다. 그 결과 뿌리 깊은 종족주의, 이기적 향락주의, 그리고 도덕적 주관주의가 문명 그 자체를 몰락시키는 걸 우리의 두 눈으로 목도하고 있다.잊지 말자. 우리는 현재 예루살렘과 아테네의 기반위에 설립된 번영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유대 기독교적 가치와 그리스 자연법 사상이 없이도 교차성과 과학적 물질만능주의, 진보적 정치 참여, 권위주의적 통치, 또는 민족적 단결 등을 통해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고 착각한다.

서방이 한순간에 붕괴될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문제는 우리가 과거부터 소중하게 생각해 온 가치관을 짓밟고 난 후에도 여전히 지금같이 풍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그 문명을 떠받치는 기반을 다시금 강화시키지 않는다면 우리가 누리는 문명은 한 세대 안에 소멸될 수 있다. 문명을 파괴하는 행위를 멈추고 다시 그 기반을 강화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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